박기사님은 첫 출근부터 밀려있는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해나갔다.
기술적인 문제, 전기문제라던지, 유압 문제가 있는 트랙터에서는 좀 힘겨워 하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밀려있던 일들이 거의 하루, 이틀만에 모두 처리되어 출고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건 나도 굉장히 바빠졌다는 것이었다.
"야~ 저기 공구함에서 연장 갖다가 F505 트랙터 앞바퀴 빼고 기름 세는거 오일실 좀 갈아봐"
처음이었다. 몇개월만에 내가 직접 연장을 들고 트랙터에 손을 대보는건.
갑작스런 박기사님의 요청에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기사들은 나에게 무엇을 고쳐보라고 한 적이 없었다. 끽 해봐야 연장 정리를 하라고 하거나
더러운 곳 청소를 하라고 했던 게 다였다.
못쓰는 부품이나 고물처리 하려고 버려둔 트랙터에 다가가서 원리가 어떠한가 쳐다볼라고 치면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호통치기에 바빴다.
괜시리 눈물이 났다. 나에게도 누군가 일을 주는구나. 대리점에서 나도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며 드디어 나도 대리점 직원 중 한명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것 같은 연장들을 들고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트랙터 앞에 가서 앞바퀴를 빼내고
어디서 누유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동안 어깨넘어로 봤던게 조금씩 생각이 났다.
축과 축을 잡아주는 주물 케이스 사이에 오일실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었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누유 되는 부분을 찾아서 오일실을 빼냈다.
별거 아니었다. 누유되는 부분의 오일실만 교체하는 되는 작업. 새 오일실을 갖고 와서 닳아서
오일이 새던 헌 오일실을 대체하고 장착하면 작업은 끝이었다.
허탈하기도 했고, 이 쉬운걸 대체 왜 호통을 치면서 못하게 했는지 송기사가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작업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앞바퀴 끼우기 전 주물 케이스를 끼우는데, 14mm 볼트 하나가 부러져버렸다.
기계의 모든 부분들은 규정 값이 정해져 있고, 그 강도 이상으로 조이면 부품이 파손 될 수 있다.
그것도 모르고 기계의 힘으로 꽉 조이다보니 볼트가 부러져서 안에 박혀버린 것이었다.
아까 느꼈던 내가 숙련된 기술자가 된 것 같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아무리 봐도 이 부러진 볼트를 다시 빼낼수가 없었다.이 볼트를 조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끼게 되면
필히 아까와는 다른부분에서 오일이 새어나올것 같았다.
너무 고민이 됐다. 그냥 낄까.. 바로 새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일단 껴서 트랙터를 다른곳에다 주차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누군가 나에게 일을 맡겼는데, 이런 단순한 일 조차도 처리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들킬까
두려웠고, 같이 일한지 얼마 안된 박기사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 쪽팔렸다.
그 고민은 거의 1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고민 끝 결론은 솔직하게 말하자 였다. 숨겨봤자 언젠간 결국 오일이 새어나와 두번 일을 해야할테고
일은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저... 박기사님"
"어 다했어?"
"제가 다 하긴 했는데 마지막에 실수로 볼트는 너무 세게 조여서 볼트를 부러뜨린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박기사님은 내가 작업한 트랙터를 스윽 한번 쳐다봤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진짜 죄송합니다 기사님 제가 이러려고...그런게"
"야임마~ 볼트가 삭았으니까 부러질만 하지. 원래 부러지기도 하고 그런거지"
박기사님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또 이런거 빼는건 전문가 아니냐. 얌마. 담배 한대 피우고 해" 하며 담배 한 개피를 주셨다.
용접기를 들고 오시더니, 부러진 볼트에 쇠붙이를 하나 맞대어 떼우고,
담배를 한대 입에 물고 불을 붙이셨다.
"어디가 그냥 여기서 펴"
예의상 멀리가서 안보이는 곳에서 피려고 하던 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같이 담배를 피우셨다.
"저거 쇠붙이 다 붙으면, 바이스 플라이어로 잡고 살살 돌려가면서 빼봐. 한방에 빠지지"
"저렇게 하면 부러진 볼트가 빠진다구요?"
사실 저 부러진 볼트를 빼는 방법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박기사님과 같이 담배를 태운 후에 바이스 플라이어를 들고 가서 아까 기사님이 용접해 놓은 쇠붙이를
슬그머니 돌려보았다. 부러진 볼트가 손쉽게 박혀있던 곳에서 풀려 나왔다.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크게 나무라지 않던 박기사님이 너무 감사해서 말했다.
"기사님 앞으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스승은 뭔 스승이여, 저거나 마저 해놓고 F455트랙터 뒷바퀴나 빼놔"
스승으로 모신다는 내 말이 어이가 없고 재미있었는지, 박기사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농기계를 지금처럼 주업으로 삼고, 기술력을 늘릴 수 있었던 최초의 사건은
이 사건이었던 것 같다. 박기사님이라는 인연을 만났고, 송기사라는 사람은 떠났으며,
겉보기에는 고칠 수 없고 뺄 수 없는 부러진 볼트라도 기계는 기계일 뿐 다 고쳐낼 수 있고 빼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문득 지금 든 생각이지만, 송기사나 고기사 또한 내 농기계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인물들일지도 모르겠다.
송기사나 고기사가 나에게 처음부터 잘해주고 잘 설명해주었다면, 나는 박기사님의 소중함, 세상의 차가움,
사회생활의 쓴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추워야 따뜻함을 알 듯, 고된 세월을 보내봐야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깨닫듯이, 나에게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들도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기연이 아니었을까..